당신 삶의 흔적

 그림을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림을 보면서 나름대로의 자유를 얻고자 함이다.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 특히 현대미술은 그 자유를 더욱더 확장시켜준다. 현대미술을 우리는 어렵게 생각한다. 르네상스적 재현의 이미지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모든 그림을 다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를 그린 재현 그림(흔히 우리는 그것을 구상이라고 부른다)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어렵게 느끼는 것은 형태가 없는 그림(우리는 이것을 보통 추상, 또는 비구상 미술이라고 부른다)이다. 모든 그림이 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어려운 것은 실제 그 그림이 어렵다기 보다는 보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코메디언이 우리를 웃길 수는 없다. 내가 웃겨야 웃는다. 아무리 사람들이 나를 웃겨도 내가 웃기지 않으면 웃지 않는다. 그림도 그렇다. 남들이 다 명화라고 해도 내가 싫으면 싫은 것이다. 남들이 다 나쁜 그림이라고 해도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다. 최소한 나한테는 말이다. 그림을 보는 주체는 나이다. 결국 내가 좋고 나쁨을 결정할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림을 보자. 작가가 우리를 감동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그림을 보고 감동하는 것이다. 내가 좋으면 선택하고 내가 싫으면 선택하지 않으면 된다. 현대미술은 그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이런 취사선택의 문제이다. 그야말로 보는 사람 맘이다.
 현대미술을 보면 일단 작가를 죽여라. 작가가 죽었을 때 관객이 산다. 작가의 의도가 물론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는 관객의 마음이다. 작가를 죽여라. 그러면 당신이 산다. 작가는 당신을 감동시킬 수 없다.
 나의 작품 <흔적> 시리즈는 나의 작업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흔적일 뿐이다. 91년 첫 개인전 주제가 <脫> 연작이었고, 93년 두 번째 개인전의 주제가 <誕生> 이었다. 99년 4번째 개인전부터 <흔적>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다. <脫>이 내 마음 속에 존재한 고답적 가치에 대한 무조건적 반항이었다면, <誕生>은 새롭게 거듭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痕迹>연작은 내 삶 속에 내재된 과거로부터의 좋고 나쁜 기억에 대한 무덤덤한 삶의 표현이다. 나의 작품에 나타난 흔적은 결국 인간에 대한 흔적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삶을 살아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또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흔적을 찾아내고, 지우는 작업이다. 화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형상은 어떤 각도나 모양으로 보든 관객의 마음에 내재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자기 흔적일 것이다. 그 흔적이 당신에게 어떻게 나타나든지 그것은 당신 자유이다. 당신 마음 속의 자유까지 내 흔적을 집어넣을 수는 없다. 당신 맘이다.  

                             
(이용택, 화가)